
"일어나라, 내 친구여.
너는 할 수 있어.
지금 여기, 네 앞에.
네가 그토록 염원하던 것이 놓여져 있어.
힘을 내.
너의 모든 슬픔, 고통, 분노.
네 손으로 모두 끝내버려."
1945. 4. 30
라이스탁 옥상에서



어두운 밤이었다.
달빛은 구름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고 길가엔 벌레의 불빛도 몇 없었다. 울어대기는 하고 있었으나
그 소리는 어제보다 조금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길을 오마치는 기억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평소 자주 왕래하던 곳이라 길을 더듬기는 쉬웠다.
그녀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요괴왕국의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인재인 사야카네 집이었다.
전 관동국 부원수이기도 한 그녀는 아주 예전에 오마치가 아직 어렸을 때 그녀를 보살폈고
오마치가 제대로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오마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묻고 배우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나 사야카의 성격은 오마치로서는 아직도 조금 무서운 일면이 있었다. 자신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내고
있는 남편, 사기노미야 사쿠야의 일면 또한 굉장히 무서웠지만 사야카에게는 그것보다 훨씬 더 차갑고 권위적인
면이 있었다. 사쿠야의 분노는 대개 감정적인 것에 많이 따르고 있지만 사야카는 항상 논리적인 사고를 하였고
자신에게 반하는 자들은 대개 사쿠야가 그러하였듯이, 그러나 더 잔인하게 처리하고는 하였다.
사야카를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수십년이 지났지만 오마치에겐 아직도 그녀가 무섭기만 하였다.
평소에도 오마치는 그녀에게 적잖은 경외감과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같이 부부관계가
소원해진 때엔 무슨 말을 들을 지 몰랐다. 특히 이런 야밤에 불러낸다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되니, 오마치는 계속 길을 더듬었다.
오는 길에 마주친 집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요괴들 대부분은 대개 일찍 자는 습관
때문이었다. 농사는 아주 고된 일이었고 나라의 대부분의 요괴들은 모두 농사에 힘을 쏟고 있었다.
설령 해병대라도,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농사였다. 훈련은 시간이 날 때에만 하고, 일손이 바쁠 때에는
훈련을 못 하는 것이 그들이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오마치는 사야카의 집에 이내 당도하였다. 그녀의 집에는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밤이 늦었고, 평소에
그녀가 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오마치는 사야카가 그렇게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야카는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거의 제일 늦게 끝마친다. 물론 가끔 일찍 잠드는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사야카의 집에 사쿠야가 다녀간 적 말고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요괴들의 상담이나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력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마치는 그녀를 경외하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마치 자신이 그녀에게 상담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늦은 밤중에 불러낸 것은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오마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렇게 넓지도 않지만 또한 좁지도 않은 집 안에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오마치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재 보관실에서 사야카가 벽장을 뒤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녀는 약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집기들이 풀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지는 않으니 말이다.
오마치는 한동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건을 찾는 뒷모습만으로도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사야카가 뭔가를 떨어뜨렸다. 어떤 풀 더미였다.
그녀는 그것을 주웠다. 그리고 뒤를 돌아 보았다.
"아?! 어휴, 깜짝이야. 왔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냥... 바빠보여서요."
"벽장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찾는 것처럼 바쁜 일은 아마 없겠지? 자, 앉아봐."
사야카가 그녀와 오마치 사이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한 쌍의 의자와 탁자가, 마치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오마치는 자리에 앉았다.
"그래. 내가 이런 시간에 불러낸 이유가 궁금하겠지?"
사야카가 자리에 앉았다.
"그래요."
"피곤했다면 사과할게."
"아뇨.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아요."
"그럼 잘됐네. 그러면... 얘기를 시작해볼까?"
사야카가 탁자에 팔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오마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음... 좋아. 요즘에 사쿠야와 너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하다고 다른 요괴들이 알려오더군."
"에..."
"변명할 필요는 없어. 당사자가 직접 왔었으니까."
"사쿠야...가요?"
"그래. 여기 왔다 갔어. 좀 전이긴 하지만. 최근 자기가 잘못한게 있냐고 물어봤어."
"네..."
"물론 그가 잘못한 건 없겠지. 과다하게도, 소홀히도 너에 대한 애정표현을 하지 않으니까."
사야카의 얼굴에서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이 나라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다 사쿠야를 좋아한다는거."
"네... 알고 있어요."
"아내 된 입장에서는 그게 영 좋지는 않겠지. 하지만 너도 잘 알듯이, 그녀들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알아요."
"안다니 다행이네. 자, 그럼 내가 말할 것은 말이야. 왜 너는 사쿠야를 기피하고 있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오마치는 조금 당황했다.
"기피하다니... 제가요?"
"너 아니면 누구겠어?"
"에... 그건..."
웅얼거리는 오마치에게 사야카가 톡 쏘듯이 말했다.
"그것도 이거다, 저거다, 분명한 이유를 주지 않고 은근히 피하고 있지. 예를 들면, 이상한 이유를 들어서
같은 잠자리에서 자지 않는다는 것이거나, 아침을 해주고 자신은 집에 없다던가. 뭐 그런 것 말이지."
"..."
오마치는 입을 닫아버렸다.
"참 나. 너는 그렇게 해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 나라. 아니, 이 대륙에서 남편 제일 잘 만난 사람이
바로 너라는 걸?"
사야카는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오랫동안 정부 고위직을 맡아왔어. 사쿠야 대신 일을 하기도 하고. 내 재량껏 일을
하기도 하고 말이지. 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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